소년 이청준이 도회지 중학교로 유학 가기 전날, 어머니와 집 앞 갯벌로 나갔습니다. 홀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아들을 맡아줄 친척 집에 빈손으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모자는 한나절 게를 잡았습니다.
이튿날 소년이 친척 집에 도착하자, 상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겼습니다. 친척 누님이 코를 막고 게 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함께 버려진 어머니의 정한(情恨)은, 이청준 문학의 씨앗이 됐습니다. "내 소설의 기둥은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몸에선 생선 비린내가 났다. 등록금 봉투에서도 났다. 선생님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어릴 적 시인은 생선 장수 어머니가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용케 등록금을 맞춰 주셨습니다. 자식 공부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갯비린내는 육 남매 평생의 힘이었습니다.
배우 유오성 씨의 둘째 형, 유상임 서울대 교수가 과기부 장관에 지명됐습니다. 셋째 형은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입니다. 어머니의 자식 농사가 여간 풍년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영월 깊은 산골에 시집 와 농사 지으며 5남매를 낳았습니다. 자식을 잘 가르치려고 읍내로 나와 쌀가게를 차렸습니다.
중학생 때 서울로 보낸 유 후보자가 서울대에 들어가자, 동생들도 차례로 보냈습니다. 뒷바라지는 할머니가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주 밤 기차를 타고 와 챙겨줬다고 합니다.
유 후보자는 미국 박사가 돼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유 의원은 검사장까지 지냈습니다.
유오성 씨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배우의 길을 갔습니다. "형들이 워낙 잘해서, 열심히 해도 티가 안 났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름은 제일 먼저 날렸습니다.
교육은 자식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였습니다. 가난에 무릎 꿇지 않고 일어서는 탈출구였습니다.
'못 배운 한(恨)' 이라는 말도 낯설어진 시대, 누군가는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게 하자'고 했습니다. 사다리가 끊긴 사회는 고인 물입니다.
산골 '삼 형제 농사'의 풍요로운 결실을 보며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7월 19일 앵커칼럼 오늘 '영월 삼 형제와 어머니'였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뉴스제보 : 이메일(tvchosun@chosun.com), 카카오톡(tv조선제보), 전화(1661-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