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을 세계적으로 키운 우리 경제의 대표 기업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불거진 정경유착과 각종 비리는 '삼성 공화국'이란 오명을 낳기도 했습니다.
화강윤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기자>
1942년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45살 나이에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 회장은 주력 분야를 섬유화학에서 전자로 옮겨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반도체와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한 본격 도약은 취임 5년째인 1993년 6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시작됐습니다.
[고 이건희 회장 (1993년 6월) :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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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당시 휴대전화 불량률이 12%에 달하자 15만 대, 5백억 원어치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회장 취임 때 13조 5천억 원이었던 삼성그룹 매출액은 취임 30년을 맞은 지난 2017년, 삼성전자 한 곳만 239조 6천억 원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성공한 건 아닙니다.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로 시작한 삼성자동차는 IMF 위기를 못 넘기고 19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또 비대해진 삼성그룹은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경제권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회장은 2005년 정치권과 검찰 등 사회 주요 인사에게 비자금을 제공한 '안기부 X파일 사건'이 밝혀져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습니다.
[고 이건희 회장 (2006년 2월) : 작년 1년은 여러 가지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전적으로 책임은 나 개인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경쟁이 하도 심해서, (삼성이) 느슨해가는 걸 전혀 느끼지를 못 했어요.]
이후 사재 8천억 원을 사회에 출연했지만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시중에 회자됐습니다.
2008년엔 그룹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이 회장 지시로 금품 로비를 하고 거액의 비자금을 관리해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