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갇혀 지은 노래들 50년만에 길동무들에게 바쳐요”

2021.10.19 방영 조회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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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익천문화재단 김판수 공동이사장 지난 10월14일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사무실에서 김판수(오른쪽) 이사장과 가수 겸 작곡가 이지상(왼쪽) 교수가 함께 만든 음반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해칠 생각이 없이” 꿈 많았던 스물입곱 살, 돌연 감옥에 갇혀야 했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그 어둠의 창살 안에서 좌절과 한탄 대신 ‘온 마음을 불살라” 노래를 지었다. 그로부터 50여년, 누렇게 바랜 악보 속에 묻혀 있던 노래들이 마침내 소리를 얻었다. 가사와 곡을 만들어 노래를 지은 그 청년은 바로 지난 3월 비영리 공익법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꾸리고 공동이사장을 맡은 김판수(79) 호진플라텍 회장이다. 편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녹음을 해 음반을 제작한 이는 가수이자 작곡가 이지상(55) 성공회대 외래교수다. 지난 14일 서울 서초동 재단 사무실에서 두 ‘뮤지션’을 함께 만나 세상에 하나뿐인 음반 <김판수 창작곡집 길동무>의 탄생기를 들어봤다. 1969년 간첩단 사건으로 5년 옥살이 대전교도소 시절 밴드에서 기타 독학 가사 쓰고 곡 붙여 만든 노래 11곡 가수 이지상씨 편곡·녹음·제작 ‘김판수 창작곡집-길동무’ 음반 발매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 함께 걷고자” 김판수 이사장이 1970년 여름부터 3년 넘게 지낸 대전교도소 시절 활동했던 밴드의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 둘째 기타맨이 서른 즈음의 청년 김 이사장이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옥살이 첫해 대전교도소에서 인쇄공장 문선공으로 출역을 했는데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굽어서 작은 납활자를 집어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그때 누군가 엠프를 사서 기증하면 밴드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귀띔을 해줬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이미 알려졌듯, 김 이사장은 1969년 5월 이른바 ‘유럽·일본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5년간 옥살이를 했다. 1970년 여름부터 3년 8개월 남짓 지낸 대전교도소 시절 그는 밴드에 들어가 혼자 교본을 보고 기타를 익혔다. 그렇게 귀동냥으로 작곡 기초를 배워 모두 11곡을 지었다. 그 가운데 10곡은 직접 가사까지 썼고, 한 곡만 그무렵 좋아했던 김지하의 시 ‘서울길’에 곡을 붙였다. 김 이사장은 “출소한 이후 생업에 몰두하느라 내내 존재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노래들이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두어 번의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재단을 준비하면서 옛 자료들을 찾다가 묵은 악보집 2권을 발견했어요. 잦은 이사 와중에도 다행스럽게 남아 있었더라고요. 하지만 어설프고 단순한 선율의 습작곡이어서 어디 내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죠. 그런데 올 봄에 재단 출범을 축하하고자 사무실에 왔던 지인들이 ‘서울길’ 악보를 보고 연주 파일을 만들어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에 올리면서 퍼져 나갔어요. 마침 재단의 송경동 이사와 하명희 사무국장이 음반을 만들어 후원자들에게 선물하면 좋겠다고해서 용기를 내게 됐죠.” 김판수 이사장이 대전교도소 밴드 시절 독학한 기타 교본(왼쪽)과 습작 노트(왼쪽).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제공 김판수 이사장이 1973년 8월17일 대전교도소 밴드 시절 ‘김민혁’ 가명으로 써놓은 ‘길동무’(컴패니언)의 악보.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제공 김 이사장은 평소 가수와 팬으로 인연을 맺어온 이 교수에게 악보를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다. “그때가 지난 3월인데, 마침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은 채 사무실에 왔던 기억이 새롭네요. 우선 빛바랜 악보들을 처음 봤을 때 그 역사성에 놀랐고, 기꺼이 음반으로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때부터 편곡작업에 들어간 이 교수는 젊은 민중가수들과 국악인 등 지인 음악인들을 두루 동원해 6개월 만에 시디와 유에스비(USB)음원 두 가지로 음반을 완성해냈다. 주제곡인 ‘길동무’와 ‘내일’은 박경하, ‘동상이몽’은 김가영, ‘삶으로 오라’는 백자, ‘도대체?’는 이민희·이진엽, ‘돌아가리라’는 최용석, ‘어둠 속의 첫 걸음’은 허영택 가수가 불렀다. 마지막 곡 ‘사랑의 빛’(Splendor of Love)은 한글곡에 이어 영어곡을 출연 가수 모두가 한 소절씩 함께 불렀다. “1973년 4월7일, 8월21일, 11월13일..., 노랗게 변색된 악보 위의 날짜들. 잊을 수 없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더욱 선명해진 음표는 정갈한 크기로 정렬되어 있었다. 국가는 청년에게서 내일을 빼앗았지만 청년은 홀로 배운 기타를 뜯으며 희망을 새겨 나갔다. 내가 받은 악보는 교도소 독방에 실낱같이 스며든 햇살을 받아 적은 역사였다. 인간에게도 뿌리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의 엄중한 무게를 담은 청년 김판수의 노래 위에 조심스럽게 선율의 옷을 입히면서 나의 발바닥도 함께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가 겪었던 청춘과 노래와 삶이 뿌리가 되어 나를 진중한 중력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 교수가 음반 자켓에 남긴 소개의 글이다. 음반에 가수로서 ‘서울길’을 부른 그는 정작 김 이사장의 ‘서울길’이 이번 음반의 백미라고 꼽았다. “일부러 사전 연습없이, 김 선생님 평소 하던대로 자연스럽게 녹음했어요. 목소리는 늙지 않으니, 청년 김판수의 꺾이지 않는 맑은 기상을 느낄 수 있거든요.”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났던 영국 유학생 김판수. 낯선 땅에서 그가 만난 것은 분단된 조국의 운명이었고, 낙후한 이 나라의 가난한 현실이었다. 이 쓰라린 발견이 그에게 부과한 것은 뜻밖에도 어둠 속의 철창생활 5년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이 그에게 단지 불행만을 안긴 것은 아니었다. 김판수는 감옥 안에서 외국어를 익히고 도금기술을 배우고 꿈과 이상을 노래로 옮기는 작곡을 연습했다. 고독과 고난을 견디며 그가 흥얼거렸던 노래들이 반세기의 침묵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도착했다.’ 재단의 공동이사장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이것은 50년 전과 너무도 달라진 세계에 던지는 희망의 전언이며 시간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의 가곡이다. 그의 노래에 들어 있는 초심의 정서를 공유하자”고 음반을 추천하고 있다. 지난 10월14일 김판수 이사장이 재단 사무실에서 후원자들에게 보낼 자신의 첫 창작곡집 음반에 하나하나 서명을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선임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 가는 길 외로울지라도/ 나의 길은 너의 길 함께 가는 길/ 너를 위해 꾸는 꿈 슬프지 않으니/ 나의 꿈은 너의 꿈 함께 꾸는 꿈. 일어나자 어둠 속에서/ 나아가자 빛을 찾아서/ 너를 위해 가는 길 괴로울지라도/ 나는 너의 길동무 언제까지나.’(‘길동무’ 가사 중에서) 며칠 전 갓 구운 음반이 도착했을 때 만감이 교차하고 감개무량했다고 토로했던 김 이사장은 ‘그 암울했던 시대의 기억이자 역사적 기록이라 생각하면 애틋한 미련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제 더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모든 길동무들에게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재단은 음반을 비매품으로 한정 제작하고, 음원은 <향뮤직>http://omn.kr/1vpwr에 공개했다. 또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시기에 맞춰 작은 콘서트를 열어 음반 발매를 함께 축하할 계획이다. 김경애 선임기자 ccandori@hani.co.kr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TV 20211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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