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는 귀여운 외모와 영리한 지능으로 친근한 동물이지만 ‘바다의 무법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다. 위키피디아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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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동물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경이롭습니다. 한겨레 동물전문매체 애니멀피플의 댕기자가 신기한 동물 세계에 대한 ‘깨알 질문’에 대한 답을 전문가 의견과 참고 자료를 종합해 전해드립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동물 버전 ‘댕기자의 애피랩’은 격주 화요일 오후 2시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든 animalpeople@hani.co.kr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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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난 9월 경남 거제시 고현항에서 범고래 3마리가 깜작 출현해 화제 된 적이 있잖아요. 먼바다에 사는 동물로만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관찰된다니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영리하고 사회적인 동물로 알려진 범고래가 ‘킬러 고래’(Killer Whale)라고도 불린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런 건가요?
A. 범고래는 모계 중심 사회를 이루며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는 영리한 동물로 알려져 있죠. 사냥할 때도 서로 협력하며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개체군마다 특유의 방언이나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해요. 검은 등과 흰 배를 지닌 귀여운 외모 또한 큰 인기 요인이죠. 그러나 이런 친근한 인상과는 달리 범고래는 ‘바다의 무법자’나 ‘바다의 깡패’로 불릴 정도로 강한 최상위 포식자로 여겨집니다.
할리우드 영화나 각종 창작물에서는 백상아리와 같은 대형 상어를 포식자로 그리고는 하지만, 백상아리도 범고래가 모습을 비추면 줄행랑을 치는 걸로 밝혀졌거든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비영리수족관인 ‘몬터레이 베이 아쿠아리움’이 지난 2019년 쓴 누리집 글을 보면, 범고래가 백상아리를 공격하는 것을 관찰한 논문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99년입니다.
범고래는 귀여운 외모와 영리한 지능으로 친근한 동물이지만 ‘바다의 무법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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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족관의 연구원이자 백상아리 전문가인 논문 저자 스콧 앤더슨 박사는 1997년 10월 샌프란시스코시 서쪽 패럴론 섬 근처에서 범고래가 백상아리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범고래들은 이미 사냥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요, “두 마리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성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공격을 받은 상어들은 그 자리에서 가라앉고 있었고요. 이후 이 지역에는 거의 2주 동안 백상아리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이 같은 지역에서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백상아리 165마리에게 무선추적장치를 부착한 뒤 관찰한 연구에서도 백상아리는 범고래가 나타나면 즉각 먹이 활동을 멈추고 자취를 감췄고, 최대 1년간 그곳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범고래의 백상아리 사냥은 미국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동남쪽 간스바이 해역에서도 2015년부터 목격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에는 갈가리 찢긴 백상아리 사체 19구가 해안으로 밀려와 범고래의 힘을 실감케 했죠. 사체는 모두 간만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백상아리의 간은 주로 지방으로 이뤄져 있어 바다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영양가 높은 먹이라고 합니다.
현지 해양생물학자 앨리슨 타우너는 ‘범인’을 이 지역에서 서식 중인 범고래 형제 ‘스타보드’(Starboard, 우현)와 ‘포트’(Port, 좌현)로 추정했습니다. 그는 과학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제 반응은 ‘또 시작이구나’ 였다”며 “얘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말했어요. 그는 2022년 5월 범고래 무리가 백상아리 여러 마리를 추격해 사냥하는 모습을 최초로 촬영해 공개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가 과학저널 ‘생태학’에 발표한 영상을 보면, 범고래 여러 마리가 백상아리 한 마리를 둘러싸고 1시간 추격하고 협동 공격하다 결국 백상아리의 가슴지느러미를 물어뜯어 정확히 간만 빼먹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급기야 올해 3월에는 범고래 스타보드가 몸길이 2.5m에 이르는 백상아리를 2분 만에 단독 사냥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죠.
범고래 무리가 백상아리를 무리지어 사냥하는 모습이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스바이에서 촬영됐다. 크리스티안 스톱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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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가 ‘킬러 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살인 고래’라고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뜻도 있지만, 정말로 고래를 사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범고래는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것일까요. 범고래의 몸길이가 6~8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긴 합니다만, 백상아리도 몸길이가 4~5m에 달해 그리 작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범고래가 고도로 지적이고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범고래는 지역에 따라 방언을 지니기도 하고, 사냥 전략 또는 특정 행동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등 ‘문화’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지난 3일 미국 워싱턴주 사우스 퓨젓 사운드에서는 머리에 연어를 얹은 범고래가 발견됐습니다. ‘연어 모자’를 쓰고 난 범고래에 황당할 법한데 현지 연구자들과 과학자들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비영리단체 ‘와일드 오르카’(Wild Orca)의 데보라 자일스는 범고래가 연어를 머리에 얹은 모습을 이미 1980년대 본 적이 있거든요. 그는 “여전히 범고래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제 추측이나 여러분 추측이나 (맞을 확률은) 비슷하다”고 전했습니다. 연구자들은 다만 이 행동이 일부 지역에서만 관찰됐고, 범고래의 평균 수명이 50~90살에 이르기 때문에 “유행이 다시 찾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추정 나이가 80~90대 중반에 이르는 암컷 범고래 ‘엘(L) 25’가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주 사우스 퓨젓 사운드에서는 1987년 이미 죽은 연어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범고래의 모습이 관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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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는 이처럼 흥미로운 동물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범고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세계보전연맹(IUCN)도 범고래를 ‘자료가 부족한 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범고래가 전 세계에 약 5만 마리 서식한다고 추정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개체군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연구는 부족한 편입니다. 현재는 ‘범고래’(Orcinus orca)라는 하나의 종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많은 과학자가 실제로는 범고래가 여러 종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 해양포유류 유전 전문가 필립 모린 박사 또한 “범고래는 아마도 인간을 제외하고 지구 위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는 포유류일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과거 19~20세기 초반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즈의 에덴을 비롯해 칠레나 노르웨이에서도 범고래 무리와 인간이 ‘협력’해 포경업·어업이 이뤄졌다는 기록을 보면, 우리가 범고래의 높은 지능과 사회적 행동에 매혹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같기도 합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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