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말대로 때가 된 것뿐이야."
세상과 화해한 오베 씨가 집 침대에 고양이와 함께 누워 눈을 감습니다. 이웃이 평화로운 임종을 지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기다리며 힘겹게 내뱉습니다.
"이제 희극은 끝났군."
주문한 리슬링 와인이 그날 늦게야 도착하자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애석하군. 너무 늦게 왔어."
70년 뒤 주당 브람스는 소원을 이뤘습니다.
베토벤 것과 같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거뒀습니다. "아, 맛있다."
아인슈타인도 집에서 쓰러졌습니다. 수술도 진통제도 거부했지요.
"인공적인 연명, 재미없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우아하게 가겠다."
릴케는 일찌감치 '죽음의 대량 생산'을 꿰뚫어 봤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병원으로 모여들어 하나같이 병상에서 죽는다.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맞으려는 소망이 갈수록 희귀하다.'
북유럽에선 가정집 같은 호스피스 마을들이 번성합니다.
생의 마지막 집에서 식사와 청소, 진료를 방문 서비스로 받습니다. 다채로운 여가 프로그램도 누립니다.
서구 노인의료 복지의 핵심 가치 '집에서 죽을 권리'(Dying in Place)를 구현하는, 한 방식입니다.
건강하게 살다 내 집에서 잠자듯 떠나고 싶은 건 우리라고 다를 리 없습니다.
재택 의료를 받으며 살고자 하는 노인이 열에 여섯 명 가깝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집에서 죽음을 맞은 이가 열에 여덟 이었습니다.
이제는 의료 기관에서 숨지는 이가 넷 중 셋에 이릅니다. 거기서 연명 치료를 중단한 이를 빼면 다섯에 셋꼴입니다.
대개는 온몸에 의료기기를 매단 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생을 끝내지요.
정부는 2027년까지 재택 돌봄 의료를 모든 시-군-구로 확대하겠답니다. 중간 단계인 호스피스조차 걸음마를 하는데, 멀고 먼 얘기로 들립니다.
가을 잎들이 하나 둘 나무를 떠나갑니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축복처럼 내 발로 마지막 날에 당도해 눈 고이 감고 싶다는 소망, 그 출발점은 병원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마음 다짐인지도 모릅니다.
11월 12일 앵커칼럼 오늘 '집에서 죽고 싶다' 였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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