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중국이 유럽연합(EU)의 화웨이 제재 동참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최근 EU가 회원국에 대해 5세대 이동통신(5G) 통신망의 안보 위험이 우려되는 기업들의 통신장비 사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다.
화웨이는 중국 최대 통신장비 기업이자 중국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화웨이가 각국 통신망에 '백도어'(인증을 받지 않고 망에 침투할 수 있는 수단)를 심어 기밀 정보를 빼낸다는 의혹이 불거진 이후 미국은 수년 동안 화웨이 제재에 집중해왔으며, 이제 EU도 미국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사정이 이런 탓에 EU를 우회로 삼아 미국의 공세를 피해 가려던 중국은 대책 마련에 애쓰고 있다.
◇ EU, 화웨이 제재 강도 높여
EU는 희토류·리튬 등 핵심 광물, 반도체 등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가 크다는 점을 의식하면서도 미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중국을 덜 경계해온 게 사실이다.
2020년 1월 EU 집행위원회는 5G 통신망을 구축하면서 안보 위험이 있는 공급자에 대해선 핵심 부품 공급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는 지침을 내놓았다.
다만 화웨이를 특정하지는 않았으며, 이 지침에 따른 회원국은 전체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
외신에 따르면 현재 EU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스웨덴·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그리고 영국 만이 5G 인프라에서 화웨이 장비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포르투갈도 화웨이 제품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유럽의 통신 컨설팅기업 스트랜드 컨설트의 2022년 보고서를 보면 독일·영국·프랑스의 5G 무선 접속망에서 화웨이 등 중국 업체들이 공급하는 하드웨어가 각각 59%, 41%, 17%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 작년 말 현재 유럽 31개국 5G 장비의 50% 이상을 중국 기업이 공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유럽에서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독일의 행보가 눈에 띈다. 친(親)중국 성향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집권 16년간에는 대중국 경계심이 옅었으나,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국가 안보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뚜렷해지면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이에 독일은 안보상 이유로 화웨이와 ZTE 등 중국 기업의 부품 사용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동맹국인 독일의 5G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중국산 통신장비 등으로 인해 미국과 독일 간 정보 공유가 손상될 수 있다는 미국의 경고를 독일이 점차 수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 3월 독일 내무부의 막시밀리안 칼 대변인은 국가 안보에 위협으로 간주하는 외국 공급업체와의 신규 계약을 금지할 수 있다면서, 잠재적인 위험 요인을 조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EU가 5G 통신망에서 중국 화웨이 장비 사용 금지를 검토해달라고 회원국들에 요청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7일(현지시간) 전했다.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로고가 있는 스마트폰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 첨단 반도체 자립 추구 EU, 美와 中 제재 공조하나
EU의 우선적인 고민 중 하나는 경쟁국들에 크게 처진 첨단 반도체 생산 기술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이 때문에 EU는 지난 4월 18일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투입해 자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EU 반도체법' 제정에 합의했다. 2030년까지 EU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이 법의 목표다.
유럽에 이렇다 할 규모의 반도체 생산기업은 없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네덜란드의 ASML과 독일 인피니언·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회사)가 있다.
EU는 이들 기업이 대만 TSMC·UMC,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일본의 니콘 등과 협력하면 이른 시일 내에 깜짝 놀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EU도 자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EU가 제외된 채 진행되는 첨단반도체 공급망 '새판짜기'는 EU에 경각심을 주는 요인이다.
현재 미국은 한국·대만·일본과 함께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 '칩4'를 주도하고 있는데 EU는 여기에 빠져 있어 자칫 불이익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특히 미국의 화웨이 공격은 집요하다. 미국은 2019년 5월부터 퀄컴과 인텔 등 자국 기업은 물론 미국산 부품을 쓰는 외국 기업들도 화웨이에 5G용 반도체를 수출할 수 없도록 했다. 이어 4G 수출도 차단할 계획이다.
EU 내에선 화웨이와 관련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우선 백도어를 통한 안보 위험이 있다지만, 그 증거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처럼 제재를 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시각이 있다.
이와는 달리 우크라이나전 장기화 속에서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에너지 의존이 유럽에 끼친 악영향을 경험한 EU가 이제 화웨이라는 '화근'을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선택은 EU의 몫이다.
◇ 中, 발끈하면서도 美와 EU 공조 차단에 주력할 듯
화웨이는 자사 5G 제품 사용 금지를 추진한다는 EU의 계획에 대해 전날 유럽 대변인의 이메일 성명을 통해 "어떤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럽에서 화웨이 장비의 백도어 존재를 보여주는 기록은 전혀 없었다"며 "비기술적 판단에 근거한 화웨이 제품 배제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위험을 초래할뿐더러 EU 시장을 왜곡해 디지털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들은 화웨이의 안보 위험을 말하면서 아무런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이것은 전형적인 유죄 추정으로, 눈을 뜨고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유럽은 자신들이 일관되게 표방해온 시장경제, 자유무역, 공평 경쟁의 원칙을 위반해선 안 된다면서 모든 사안을 정치화·안보화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EU의 이런 행보에도 중국은 압박보다는 설득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입장 차이가 작지 않은 유럽을 붙잡아 미국과의 공조를 막으려는 의도에서다.
중국은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놓고 EU와 관계가 악화하기는 했지만, 중국이 EU의 최대 무역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EU 붙잡기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이 외교 담당 중앙정치국원과 친강 외교부장, 왕원타오 상무부장을 유럽에 보내 중국에 대한 지지를 당부하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EU 붙잡기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듯하다.
실제 지난달 19∼21일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도 미국이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시도했으나,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EU 회원국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에서 미국 주도로 중국을 겨냥한 공급망 등 디커플링(분리)이 논의됐지만, 결국 이보다 수위가 낮은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으로 가닥이 잡혔다.
kji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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