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2008년 케빈 러드 호주 총리는 의회에 나가 "반성합니다" 다섯 번, "미안합니다" 아홉 번, "사과합니다"를 열여덟 번 말했습니다.
호주 정부의 원주민 탄압을 백년 만에 사과하는 자리였습니다.
사상 처음 의사당에 들어온 원주민들은 춤을 추며 자축했고, 서로 껴안고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가 많습니다. "제가 어떤 잘못을 했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잘못"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피해를 줬다니 유감" 운운하는 경우들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가 '머리를 숙이는 방향이 틀린 사과' 입니다.
한-뉴질랜드 정상 간의 통화에서 외교관 성추행 문제가 제기되는 바람에 나라 망신을 당한 일이 그랬습니다. 그 책임과 질책은 장관의 몫이고, 사과는 국민이 받아야 했지만, 장관은 엉뚱한 곳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대통령께서 불편한 위치에 계시게 된 점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가 현충원에 무릎 꿇어 참배하고 남긴 방명록입니다. '피해자님'은 박원순-오거돈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피해호소인'보다는 나은 극존칭인데도 어 이게 뭐지라는 의구심을 먼저 불렀습니다.
당장 오거돈 사건 피해자가 "저는 순국선열이 아니다. 말뿐인 사과는 필요없다. 제발 그만 괴롭혀라"고 했습니다. 박원순 사건 피해자 측도 "장소와 방법이 부적절하다"고 했습니다.
윤 원내대표는 "직접 찾아가면 신원이 밝혀질까 봐 그랬다"고 했지만, 그 방법이야 찾으려고만 했다면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다"는 옛말도 있듯, 사과와 해명, 위로와 감사에도 적절한 장소와 방식, 지켜야 할 법도가 있습니다.
"플로이드가 목숨을 희생한 데에 감사한다"고 말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팽목항 세월호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고 썼던 일도 그래서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사자성어에는 이렇게 '동서'가 들어간 게 많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분간 못하는 듯한 사과에, 현충원에 계신 선열들도 어리둥절하셨을 것 같습니다.
피해호소인이라는 기발한 호칭으로 본질을 눙치고 지나가려 했던 일이나 이번 경우나 모양새는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4월 23일 앵커의 시선은 '진짜 사과란' 이었습니다.
신동욱 기자(tjmic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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