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러분, 이건 전에 처음에 기자회견할 때 있었습니다. 있는데 이것을 제가 읽기는 조금 힘듭니다. 해서 이것을 전부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부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것은 이따 돌려드리도록 하고. 제가 두 번째 기자회견을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또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제가 처음에 기자회견 할 때 했는데 너무 보니 많이 생각 못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입니다.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그런데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 하는 건 정신대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공장에 갔던 할머니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 데가 다 다릅니다. 잠깐 제가 갔던 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나이로 하면 열여섯 살. 만으로 하면 열네 살입니다. 저는 양력으로 돼 있습니다. 왜?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갈아서 야스하라라고 갈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도 그때는 일본 학교입니다. 제가 3, 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가나를 알았습니다. 끌려가서도 대만 신주 가미카제부대, 특공대 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가나로 써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군인이 하는 얘기도 피해자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 듣는 얘기라서 히가이샤, 히가이샤가 뭔지 적어주는 걸 외우게 했습니다. 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도시코, 야스하라 도시코라고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코 같은 피해자라는 걸, 히가이샤라는 걸 적어줬기 때문에 히가이샤가 뭔가 몰랐습니다.
그 후에 제가 생각할 때 끌려가서 당한 건 말로는 못합니다. 제가 쭉 30년 동안 해 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 하고 이러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라는 데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