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며 천둥 번개와 우박이 쏟아집니다. 익어가던 곡식이 쓰러집니다. 이윽고 선선한 가을밤이 찾아와 느긋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팔분쉼표로 숨가쁘게 내달려온 여름도, 9월이면 숨을 고릅니다.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이부자리를 편다.'
가을은 조용히 옵니다.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늘 오고 가는 것이지만 계절 바뀜처럼 매혹적인 기적이 있을까요.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별빛 보석을 줍더니…'
우리 고유 이름 추석(秋夕)은 글자로 보면 '가을(秋) 저녁(夕)'입니다. '가을 보름달 뜨는 저녁'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 추석은 여름 저녁 '하석(夏夕)'입니다. 열대야에 달이 떠 풍덩 빠졌습니다. 오늘 전국 시·군 백 여든세 곳 가운데 백 스물다섯 곳에 폭염경보가, 마흔한 곳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진이 빠져 녹초가 됐습니다. 그러고서야 9월 폭염이 고개를 숙일 모양입니다. 모레 비가 내리면서 서울 최고기온이 30도 아래로 내려가고 열대야가 끝난답니다. 일요일부터는 최저기온도 20도 밑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릴케는 여름이, 풍요로운 가을을 불러왔다고 찬미했지요.
'주여,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올 여름은 그러나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가을 오는 길목을 참으로 악착같이 막아섰습니다.
아폴리네르는 가을을 예찬했습니다.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하지만 여름한테 죽다 살아난 건 가을입니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탐욕과 증오, 욕설과 저주가 뒤엉켜 열대야처럼 끈적거리는 세상도, 이제는 가쁜 숨을 골랐으면 합니다. 서로 아우르고 북돋우는 가을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의 기도처럼.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9월 18일 앵커칼럼 오늘 '한여름 추석, 하석(夏夕)' 이었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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