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모르죠. 다신 못 만날 수도 있고요."
"우리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면, 만날 거예요. 지금은 아니고요."
우연히 만난 남녀가 재회를 운명에 맡기고 헤어집니다.
연락처를 각자 책과 지폐에 적어 세상으로 흘려 보냅니다.
몇 년 뒤 우연찮게도 책은 남자에게, 지폐는 여자에게 돌아옵니다.
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천 원짜리에 새 한 마리를 그려 다른 돈과 함께 썼습니다.
6년이 지나 천 원짜리가 새처럼 날아들었습니다.
'안성에서 썼던 것이, 바다 건너 제주도 호텔 앞 술집에서 나에게 돌아왔다. 야 네가 웬일이냐. 돈, 오랜만이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하지요. 우연 같지만 돈의 수레바퀴는 필연의 사슬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우연찮다'는 말뜻이 '우연하다'와 비슷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겁니다.
'대장동 50억 클럽'과 '재판 거래' 의혹을 받아온 권순일 전 대법관이 고발된 지 3년 만에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그를 문재인 정부 때 비공개 소환한 이래 지난주에야 불러 조사했습니다.
관련 '특검법'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떠밀리듯 속도를 낸 걸까요. 그나마 핵심 의혹 '재판 거래'는 뒷전이고, 변호사법 위반으로만 넘겼습니다.
퇴임 후 변호사 등록 없이 김만배 씨의 화천대유 고문으로 활동한 혐의입니다.
4년 전 대법원은 이재명 경기지사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2심 유죄를 무죄로 뒤집었습니다.
당시 권 대법관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요.
하필 그 대법 판결을 전후해 김만배 씨가 권 대법관 사무실을 여덟 차례 찾아갔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저 공교로운 우연이었을까요.
법원은 그간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을 세 차례나 기각했습니다.
권 전 대법관이 화천대유 고문료로 1억5천만 원을 받은 것도 합리적 의심을 받을 만합니다.
세상 일은, 우연이라는 씨줄과 필연이라는 날줄이 짜는 천이라고 합니다.
우연만으로 엮어지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돈 냄새, 동취(銅臭)가 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검찰의 수사 성적표가 초라합니다.
8월 8일 앵커칼럼 오늘 '권순일 김만배의 우연'이었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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