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두 살 할머니가 난생처음 우체국에 갔습니다. 아들에게 쓴 편지를 부치려고, 주소를 또박또박 써내려 갑니다. 할머니는 시인입니다. "아들이 참 고맙다. 밥 잘 무라. 어미시다 (밥 잘 먹어라. 엄마다)" 아들이 보내온 답장,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읽어 내려갑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편지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성스러운 어머니의 글씨에 눈물이 났습니다"
경북 칠곡의 할머니 시인들은 마을 한글학교에서 글을 깨쳤습니다. 일제 암흑기에 한글을 배울 수 없었고, 나라를 찾은 뒤에도 가난에 치이고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요. "생닭, 토종이라" "시장 식품…" 글이 늘어가면서는 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글학교 반장 박금분 할머니가 푸시킨의 명시를 필사합니다.
할머니들은 평균 연세가 일흔아홉일 때 첫 시집을 낸 이래 모두 네 권을 출간했습니다. 사투리 그대로, 질그릇처럼 투박한 시구에, 천진하도록 순수한 일상의 생각들을 담아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돼서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 무심한 듯, 달관한 듯 삶과 죽음을 바라보던 시처럼, 아흔세 살 최고령 칠곡 시인 박금분 할머니가 세상을 떴습니다. 가족은 "마치 꽃잎 지듯 곱게 눈을 감으셨다"고 전했습니다.
할머니는 늘 밝고 활달했다고 합니다. 글씨와 시를 연습할 때면 온 방에 종이를 늘어놓을 만큼 열심이었다고 하지요. 말년에 치매가 닥쳐와, 늦게 배운 이름자도 잊어버렸지만,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연필을 잡았다고 합니다.
칠레 시인 네루다는, 시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만물이 어느 날 달리 보이면 그것이 시라고 했지요. 시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고 숨결이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렇듯 전혀 거창하지 않은 시의 이치가, 박금분 할머니의 짧은 시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시는 또, 위로입니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착하고 따뜻하게, 열심히 슬기롭게 살아가며 서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일 겁니다. 소설가 김훈은 칠곡 할머니들의 시에 경배했습니다. "우리처럼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도저히 쓸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질감이 실려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온갖 비바람 무서리를 무던하게 받아내며, 자식과 가족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세상 모든 어머니는, 애초부터 시인이셨을 겁니다.
2월 8일 앵커의 시선은 '칠곡 할머니, 시처럼 떠나다' 였습니다.
신동욱 기자(tjmic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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