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만 명에 가까운 고려인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은 동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대한고려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정영순입니다.
저는 오늘 아주 특별한 요리를 만들 계획입니다.
제 인생과 똑 닮아 있는 음식이죠.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한국은 반도라서 해산물로 많이 육수를 우려내잖아요. 수제비라는 요리를 갖다가 이민자들이 와서 통합하듯이 저도 똑같이 러시아식 닭국에다가 (한국식) 수제비를 넣어 만들어 보겠습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시작된 제 삶은 셀 수 없는 이주에 이주를 거쳐 2년 전, 인천에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부모님이 (이르쿠츠크에) 유학을 가게 돼서 제가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자란 곳은 사할린이고.]
세상에 유일한 정영순 표 '닭 육수 수제비'는 유학생 시절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든 요리인데요.
그 시절의 음식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고국을 그리워하며 만든 저만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한국 요리책이 있었어요. 그 책을 바탕으로 매일 매일 (한식을) 만들어 보고 그랬어요. 워낙 맛있으니까, 친구들이 한식이 너무 맛있다고….]
당시 제가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라 선택한 전공은 내 민족, 내 뿌리를 찾기 위한 '한국어'였습니다.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저마다 자신만의 민족성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자 제 방향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당시 1991년도에는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수 민족들이 많이 드러나고 자기의 타고난 민족성 또는 나의 정체성 문제가 강하게 대두됐습니다. 동포라서 저도 그러면 한국어, 한국 문화를 배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달걀 물을 휘휘 저어 맛을 더하고 러시아 음식에는 잘 쓰지 않던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니 어느덧 소담스럽지만 따스한 한 상이 완성됐습니다.
그토록 고국을 그리며 만들던 음식을 이젠 고국에서 딸과 마주 앉아 먹습니다.
"맛은 원래 그 맛이지? 맛있어?' "응 맛있어."
"감자가 잘 익었나 걱정됐어."
가족은 제가 '귀화'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낳아준 엄마와 길러준 엄마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한국 귀화를 하게 되면 그전에 가지고 있는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태어나게 해 준 엄마랑 입양해 키운 엄마랑 둘 중에 선택해야 하는 그런 상황처럼 무거운 고민이었습니다. 앞으로 여기(한국에) 살면서 애들도 키우고 살고 싶은 생각이 있어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 헛되지 않도록, 가족 모두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고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데요.
말도, 문화도 낯선 환경에서 잘 적응해나가는 아들딸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사실은 귀화를 택하면 귀화한 동포들은 군대가 면제돼요. 그런데 자기(아들)가 그래도 한국 국적이니 군대를 한번 가봤으면 하는 그런 결심을 했고…. 한국말을 잘 못 하면서도 잘 버티고 모범병사까지 되는 것을 보니 엄마 마음에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둘째는) 국적상으로는 한국 사람인데 사실은 집에서는 러시아어를 쓰고 사는 곳이 한국이지만 한국어는 완벽하지 않아가지고(서)…. 그래서 (둘째가) '나는 누구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경험을 하면서 내가 누군지 자기가 알아내고 깨닫는 건 자기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고려인 대표로 활동하며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 12만 명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고려인은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정체성 혼란에 빠지곤 하는데요,
그들에게 제가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향이 두 곳이나 되니 얼마나 좋냐"고 말이죠.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주변의 고려인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자기가 출신국에서는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한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한인들이 살고 있는 한국 땅으로 오더니 말도 못 하고 무슨 나라인지 이해도 안 되고 그러니까…. 그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나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해서 나는 거기(출신국) 가면 그 나라 언어도 하고 문화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편하게 살 수도 있고 한국에서도 똑같이 말도 하고 문화도 배우고 계속 뭔가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고향이 두 개다'라는 입장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 터를 잡은 고려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과 고충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고려인들이 한국의 말과 문화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차세대 교육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유나 / 고려인 4세 : 언어 장벽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어(한국어)를 배울 시간이 없어요. 저도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외에는...]
[정영순 / 고려인 3세·대한고려인협회장 : 지금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가 우리(고려인) 차세대예요. 지금 많은 고려인들이 자기 자식을 (한국에) 데리고 왔는데 한국 학교를 보냈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이 적응을 잘 못 해서…. 고려인 마을에서 이런 상황에 있는 학교들은 아예 이중언어 학교로 한번 (전환)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 고려인 아이들만 훨씬 큰 이득을 받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렇게 이중언어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 나중에 그런 아이들이 커서 한국 경제에 엄청 크게 이바지할 수 있고 CIS(독립국가연합) 나라와의 다리도 되고….]
언젠가 한민족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한국과 러시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닭 육수 수제비' 한 그릇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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