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가장 깊숙한 건청궁 옆에 나직한 언덕 녹산이 있습니다. 왜인들이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웠던 곳입니다. 거기 세자가 살던 자선당의 기단 석재들이 보관돼 있습니다. 일본 부호 오쿠라가 자선당을 뜯어내 도쿄 집에 옮겨 지었다가 불타버린 잔해들을 환수해왔지요. 그 돌들에, 지금 우리가 쓰는 개량 온돌의 내력이 숨어 있습니다.
현대 건축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일본에 갔다가 오쿠라의 한옥에 초대됐습니다. 그는 따스한 온돌에 매료돼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낸 온수 순환식 온돌이, 우리 보일러 난방으로 정착된 것이지요.
오일쇼크를 거치며 대세가 된 가스 난방시대의 상징적 광고입니다.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하지만 부모님들에겐 늘 가스비 걱정이 따라다닙니다.
"가스비는 어쩔 거야. 가스비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가스비 많이 나오면 무지 열받거든"
"등 따숩고 배부르면 살 만하다"는 말도 있듯, 한겨울 따뜻한 온돌만큼 서민의 삶을 받쳐주는 게 있을까요.
추위와 함께 다들 집마다 날아든 가스요금 폭탄의 충격에 빠졌습니다. 다음 달 고지서는 더할 거라는 소식에 보일러 틀기가 무섭다고들 합니다.
도시가스 요금은 지난해 4월 이후 38퍼센트가 올랐지만 체감하는 충격은 훨씬 더 큽니다. 한파 때문에 난방을 많이 켠 탓도 있지만, 폭등한 국제 LNG 가격을 문재인 정부가 제때 요금에 반영하지 않은 탓이 작지 않다고 합니다. 가스공사가 여덟 번이나 요금 인상을 건의했지만 번번이 묵살했던 겁니다. 그러다 대선에 패한 직후에야 인상해 얄팍한 속내를 드러냈지요.
한전에 쌓인 천문학적 적자가 몰고 온 전기요금 인상과 판박이처럼 닮았습니다. 미루고 미뤘던 '공짜 점심'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민주당은 7조 넘는 추경을 편성해 국민 열에 여덟 명에게 25만 원까지 주자고 합니다. 국민의힘 일각에서도 비슷한 보편 지원 주장이 나왔습니다. 돈을 풀어, 가뜩이나 폭주하는 물가에 채찍질을 하는 전형적 포퓰리즘입니다.
천연가스를 모두 사와야 하는 우리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스값이 오르면 요금 인상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아껴 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특히 에너지 소비가 많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보일러 온도를 낮추며 고통을 분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럴 때 나라의 지원은 취약계층에 집중해야 맞습니다. 에너지 교환권 지원금 확대도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원 대상이면서도 몰라서 신청하지 못한 사각지대를 빠짐없이 챙기는 일도 시급합니다. 외진 곳, 얼어붙은 냉골에 온기를 되살리려면 보일러 말고도 놓아드려야 할 게 많습니다.
1월 31일 앵커의 시선은 '더 낮고 더 추운 곳으로' 였습니다.
신동욱 기자(tjmic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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