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그때 광주에 왔던 군인들 중에서도, 40년을 고통 속에서 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 가는 줄도 모른 채 투입이 돼 보니까 광주였고,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그 참상과 마주하게 된 겁니다.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김학휘 기자가 그중의 한 명과 만났습니다.
<기자>
[저는 40년 전에 광주에 왔던 육군 제20사단 91대대 운전병이었던 정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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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육군 일병 정현수 씨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성남공항에서 군 수송기에 올랐습니다.
[정현수/1980년 5월 당시 '광주 투입' 육군 일병 : 내려보니까 광주 송정리 비행장이더라고. 아, 이거 뭔 일이야. 차에서 내리니까 시체가 보이는데 상무관 앞에 가마니로 덮어놨더구먼.]
전남도청 인근의 검문·검색 임무를 받았습니다.
[정현수/1980년 5월 당시 '광주 투입' 육군 일병 : 시체 보면 너무 참혹했죠. 여자가 죽어 가지고, 그 여자를 생각을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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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에서 총 한 발 쏘지 않았지만 죄책감과 공포가 뒤엉킨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정현수/1980년 5월 당시 '광주 투입' 육군 일병 : 그 여자 분. 그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갈 때 저 혼자 막 울어요. 정말로 어떨 때는 한 없이 울 때가.]
정신과 치료도 받았지만, 오월만 되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합니다.
[차종수/5·18 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 : 당시 참여했던 군인들도 정부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해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5·18 진상조사위도 보통 군인들의 고통과 증언을 기록하는 진상 조사를 할 방침입니다.
[정현수/1980년 5월 당시 '광주 투입' 육군 일병 : 죽기 전에 내가 있는 그대로 본 것을 나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 그 하나를 난 하고 싶지, 딴 거 필요 없어요.]
(영상취재 : 설민환, 영상편집 : 이승열, CG : 서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