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당시 전남도청에는 신군부의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려는 시민군 수십 명도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기동타격대라 부르며 죽음까지 각오했던 사람들이지만, 중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상처투성이었던 이들의 지난 40년은 임태우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40년 전 광주 시내 다방에서 일했던 염동유 씨.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시민군이 됐고, 기동타격대에도 망설임 없이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에 붙잡힌 뒤 더욱 모진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염동유/5·18 기동타격대원 : 메리야스 구석에다가 '순 악질'이라고 써놔 가지고, 천막에서 두들겨 패요. 그때는 아주 우리가 6개월 동안을 두들겨 맞았어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장애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국가 배상금은 18년 전에 받은 3천만 원이 전부입니다.
[염동유/5·18 기동타격대원 : 수술을 다리에 11번 했습니다. 지금은 (심한 통증으로) 이 머리가 이상하게 돼서 돌아버려요.]
계엄군 총탄을 손에 맞았던 김재귀 씨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립니다.
[김재귀/5·18 기동타격대원 : 눈만 감으면 꿈속에서 제가 누구한테 쫓기는 꿈, 아니면 우리들이 막 달아나는데 '저 ○○ 잡아라. 저 ○○ 잡아라!' 막 쫓아 오는 꿈(을 꿔요.)]
총상이나 악몽보다 이들에게 더 무서운 건 '빨갱이'라는 낙인이었습니다.
[김재귀/5·18 기동타격대원 : 막노동이나 좀 하고, 어디 들어갈 데도 없어요. 공장에서도 안 받아줍니다, 솔직히. (전과 기록을) 다 떼어보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거절….]
사회적 차별에 생활고까지, 이들의 삶은 망가져 갔습니다.
40년 전 행동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임성택/5·18 기동타격대원 : 후회한 적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도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다는 그 자부심 하나 갖고….]
임태우 기자(eigh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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