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이 스웨덴 현지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다 깊이 있게 소개하는 기념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강연은 노벨 주간 가장 주목되는 일정 중 하나로 꼽히는데요,
현장으로 가보시죠.
[한 강 / 노벨문학상 수상자]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습니다. 열어보니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 연하문건이 담겨 있었습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습니다. A5 크기의 갱지 5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마한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2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습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6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7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요.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요.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8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습니다. 페이지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8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된 시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40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습니다. 볼펜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습니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습니다.
그 8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실. 빛을 내는 실. 그 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 지금도 좋아합니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습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 됩니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습니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삽니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화면출처 : Nobel Prize Outreach
YTN [한강] (sj1029@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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