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문화계를 이끌어 온 네 명의 명사들이 여행을 떠난다.
건축가 김원(78), 연극배우 박정자(79), 소설가 조정래(78), 피아니스트 백건우(74)...
이들은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채 시간 속에 살아남은
문화유산의 가치와 미학을 찾아 길을 나선다.
우리 소리의 구성진 가락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소릿길’
고대 동아시아 문명교류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백제 고도의 길’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그리고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중첩되어 있는 ‘왕가의 길’..
역사로 이어지고 있는 이 ‘세 개의 길’ 위에서
이들은 무엇을 만나고 또 발견하게 될 것인가.
이들의 ‘특별한 가을 기행’을 따라가 본다.
▶소리와 문학을 품은 자연의 길
-“자연이 그 자체로 액자가 되잖아요”-박정자(연극 배우)
[특별한 가을 기행]의 첫 번째 여정은 전라북도 고창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선운산과 풍천장어로 유명한 고창은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판소리 연구가인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했다. 지금도 고창읍성 안에는 신재효가 살았던 옛집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우리 소리의 구성진 가락은 세대와 세대를 넘어, 어떻게 전승되고 있을까.
고창은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는 자신의 고향인 질마재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유명한 시 구절을 남겼다.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미당 서정주 문학관은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만나는 길목에 있다. 서정주의 시를 사랑하는 연극배우 박정자와 함께 시인을 키운 바람을 느껴본다.
소리와 문학으로 이어진 길은 전라남도 보성까지 닿는다. 보성에는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또 다른 문학관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다. 이곳에서 조정래 작가와 만난 건축가 김원은 소설 속의 배경이 되는 현장을 찾아 [태백산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천년 역사를 지닌 찬란한 길
-“공산성은 지형의 특징을 잘 활용한 천혜의 요새”-김원(건축가)
두 번째 여행길은 1400년 전 백제로 이어진다. 눈부신 금강을 따라 백제의 유산들을 연결하는 ‘백제 고도의 길’이 그곳이다. 금강 옆에 자리한 공주 공산성은 웅진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판축 기법으로 지어진 이 성은 천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단단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보호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공산성의 면모와 그곳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를 살펴본다.
공산성에 올라서면 높이 솟은 십자가 하나가 눈에 띈다. 건축가 김원이 스스로 역작이라 평하는 ‘황새바위 순교성지’가 그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름도 없이 죽어간 곳, 그 위에 세워진 작은 경당에서 고요한 가을 정취를 느껴본다.
▶비극을 딛고 일어선 성군의 길
-“눈물로 한중록 썼던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느껴본다” 박정자(연극배우)
각박한 대도시에서도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창경궁 경춘전을 찾았다. 연극에서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박정자는 ‘혜경궁이 되기 전에는 경춘전을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경춘전은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낳은 곳이자, 말년에 <한중록>을 집필했던 전각이다. 창경궁 명전전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재현하기도 했던 연극배우 박정자와 함께, 아름다운 고궁을 산책해 본다.
정조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 아픔을 딛고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 군주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담아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창경궁이 정조의 과거와 아픔을 상징한다면, 수원화성은 정조의 미래와 이상을 상징한다. 건축가 김원은 수원화성을 ‘정조의 이상이 담긴 신도시’라 평가한다.
창경궁과 수원화성을 연결하는 ‘왕가의 길’. 김원은 수원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만난다. 유럽의 유명한 도시를 모두 거친 백건우도 수원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라 말한다. 왕과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 수원 화성의 야경 위로 백건우의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 길 위에서 만나게 될 ‘문화의 지문’들
-“문화재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재산이다”- 김원(건축가)
소릿길, 백제 고도의 길, 왕가의 길.. 세 개의 길을 걸으며 문화재 기행을 하는 동안.. 건축가 김원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전 시대를 추억할 수 있는 재료로써 문화재는 정말로 재산이다’라고 말한다.
문화재는 단순히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통로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가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늦가을 길 위에 남겨진 문화의 지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가 남긴 우리 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