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일시 : 2021. 10. 2. (토) 밤 11시 40분 (KBS1)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는 것들에게는
그것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다.
경북 영주시 봉현면 노좌1리에서 60년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점빵.
점빵을 지키는 팔순의 노부부와 함께
가난해도 정이 넘치던 오래전 그날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 김치는 마당에 묻고, 추억은 오래된 점빵에 묻다
사과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북 영주. 봉현면에 있는 노좌1리엔 사과 말고도 명물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오래된 점빵이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권기섭(87) 할아버지와 열여덟에 시집 온 박옥흠(86) 할머니는 지난 60년 세월, 간판도 이름도 없는 점빵을 꾸려왔다.
1962년에 문을 연 점빵은 장을 보러 가려면 재를 하나 넘어야 하는 오지 마을 주민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인구가 제법 많았던 노좌1리에서 점빵은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시내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겐 버스정류장이자 대합실이요, 인근 초등학교 선생들에겐 하숙집이자 간이식당이기도 했던 점빵은 언제나 이웃들의 발길이 머물렀다 가는 따뜻한 사랑방이었다.
김치는 마당에 묻고, 추억은 오래된 점빵에 묻었다는 이웃 주민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이 다 도시로 떠나가고 초등학교도 폐교된 지 20년이 넘은 마을에선 점빵을 찾는 손님 발길도 뚝 끊긴 지 오래. 백발이 성성해진 두 내외만이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기다린다.
■ “그 놈의 정(情) 때문에” 다정도 미움도 곰삭은 노부부의 세월
오늘도 풍기행 시외버스는 빈차로 지나간다. 기다리는 손님 대신 파리만 극성인 점빵. 어쩌다 찾아온 손님을 앉아서 맞이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버럭 역정을 낸다.
첫날밤부터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평생 아내 아까운 줄 모르는 영감님이 할머니는 야속하다. 열여덟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해 영주 히티재를 울며 넘어온 할머니에게 눈물 고개는 시작일 뿐이었다.
점빵에, 하숙에, 밭일에, 5남매 독박 육아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세월을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새마을지도자랍시고, 마을 일에 앞장서느라 가족과 집안일은 항상 뒷전이었다. 성정은 또 얼마나 불같았던지 밭일에 몰두해 점심때를 놓쳤다고 부엌살림을 다 부수질 않나, 이웃집에 잠시 마실 갔다고 대문을 잠가버리질 않나...
지난날을 생각하면 밥도 주기 싫을 만큼 미운 영감님. 그러나, 직장암에 허리 수술로 오래 병원 신세를 지고 거동이 불편해진 영감님을 보면 마음이 또 짠해지는 할머니는 오늘도 영감님 드실 꼬리곰탕을 고느라 아궁이에 장작을 지핀다.
■ 50년 묵은 할머니의 그리움
지난 세월, 점빵과 하숙집을 지키면서 만났던 수많은 얼굴들이 지금도 할머니 기억 속엔 선명하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가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 바로 둘째 딸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인 반찬화 선생님이다.
딸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며 중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던 영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세 시간이 넘게 졸랐던 선생님. 그 덕에 둘째 딸은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르신, 제가 어제 월급 타놨어요. 그걸로 입학금 막을까요?” 했던 선생님 목소리가 아직도 할머니 귓가에 쟁쟁한데... 다시 만나면 든든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은 그리운 선생님, 할머니의 50년 묵은 그리움은 언제쯤 끝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