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용산병영, 미군 임시기지 ‘캠프 서빙고’가 되다
1945년 9월, 인천항을 통해 입성한 미24군단 주력과 예하 미7사단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단 10분간의 항복조인식을 통해 38도선 이남에서 일본의 35년 지배를 공식적으로 끝냈다. 1년 후, 미 육군수송선 펀스턴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배에는 미군과 외교관 가족 187명이 타고 있었다. 일본군이 떠난 용산병영을 캠프 서빙고라 명명한 미군은 이곳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당시 남한 사회는 좌우 이념의 갈등 속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후 미군사고문단(KMAG) 500명을 제외한 주한미군의 완전철수까지 이어지면서 혼돈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격변의 시기 속 담장 밖과는 전혀 다르게 흘렀던 용산기지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 단 1년. 대한민국 정부, 용산기지의 주인이 되다
1949년, 미군 한국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불안했던 38선 정황에 대한 보완장치로 창설한 주한미군사고문단(KMAG)과 함께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한다. 처음으로 우리군이 용산기지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정부수립 직후 국군의 뿌리가 형성되던 이 시기에 용산기지에서 ‘국군 7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함으로서 비로소 8개 사단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1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용산기지는 다시금 미8군에 공여된다. 단 1년간의 대한민국 용산기지 시절, 그 짧았던 역사를 되돌아본다.
❒ 김두한, 안두희...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해방정국의 혼란 속, 우익테러단체 조직 중 하나였던 대한민주청년동맹이 좌익활동가를 납치해 살해하는 사건을 벌인다. 테러단체 별동대를 이끌었던 이는 김두한. 미군정은 군사재판을 열어 김두한에 교수형을 선고한다. 사형전까지 김두한이 구금된 곳이 용산기지 내 ‘미7사단 구금소’였다. 그리고 2년 후, 백범 김구가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 의해 서대문 경교장에서 암살된다. 암살범 안두희가 구금된 곳 역시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명칭이 바뀐 용산기지 내 구금소였다. 6.25 전쟁 발발 전날 밤, 육군 수뇌부들이 육군본부 장교클럽 개관 파티를 빌미로 술판을 벌였던 곳도 용산기지 내 현 캠프코이너 부지였고, 현재 사우스포스트 벙커인 육군정보국 건물은 한강 다리 폭파가 결정된 곳이기도 하다. 해방정국과 6.25 개전 초기, 역사의 인물들과 함께 했던 공간으로서 용산기지에 얽힌 뒷이야기를 짚어본다.
❒ 미8군, 본격적인 용산시대를 열다
주한미군의 대명사 미8군. 6.25 전쟁으로 한국땅에 발을 디딘 이래 전쟁으로 황폐화한 용산기지의 재건, ‘용산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에서 군단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담장 밖 한국 사회가 격변의 시간을 보낼 때 담장 안이라고 조용할 리 없었다. 5.16,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2.12 등 그날 그 순간 용산기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50년 이래 용산기지를 거쳐온 다양한 연령대의 카투사와 퇴역 미군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그래서 궁금했던 용산기지의 숨겨진 모습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 다가올 내일, 용산공원을 향한 시간들
2년 전, 미군 장교숙소 5단지 개방과 함께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지던 용산공원 조성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생태를 복원한 도심 속 자연치유의 공간이자 역사적 치유와 회복을 위한 평화의 공간으로 조성될 국가공원 1호 용산공원. 1945년 캠프 서빙고에서 시작된 용산기지라는 공간이 용산공원으로 변모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