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 다시 서다>
방송일시 : 2021년 6월 4일(금) 밤 10시 50분 KBS 1TV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궁궐’ 하면 으레 ‘경복궁’이었죠.
수도 한성부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치 철학을 담아 최상의 기술과 격식을 갖춰 지은 조선의 첫 궁궐이자 1395년 창건 이후 626년간 제자리를 지키며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경복궁. 복원 30년을 맞은 2021년, 경복궁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 가치는 무엇일까.
■ 조선의 첫 궁궐, 서다
조선은 첫 궁궐, 경복궁에 새 왕조의 희망을 담았다.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뜻의 경복궁엔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거듭 생각해 이를 펼치라는 경고와 자성의 의미가 전각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경복궁을 그린 기록에서 전각들이 사라진다. 겸재 정선은 기둥만 초라하게 남은 경회루와 함께 수풀만 울창한 풍경으로 경복궁을 묘사했다. 그런데 1868년, 근정전이 다시 기록에 모습을 나타낸다. 강력한 왕권 아래 부활을 꿈꿨던 조선, 전권을 위임받아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이후 276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한다.
■ 주인 없는 궁궐
“조선총독부 청사는 우연히 그 자리에 선 게 아닙니다.
‘광화문 앞길, 그 길의 주인이 나다.’ 주인 행세를 하면서
경복궁을 부정하는 효과를 노린 건물이죠.”
창건 때보다 더 웅장한 모습으로 되살아난 경복궁. 그런데 불과 30여 년 만에 경복궁은 다시 휑한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은 모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일제는 경복궁 전각을 경매에 부쳤고 팔려나간 건물들은 일본 사찰이 되고 요정이 되었다.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전각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내전 전각들도 헐어 없앴다. 그렇게 비워버린 경복궁에서 일제는 일본 문명의 우월성과 국권 침탈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각종 박람회를 개최했다. 일제의 최종 목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경복궁을 가로막는 위치에 경복궁을 가리는 크기의 청사를 세워 경복궁을, 조선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에도 경복궁에선 산업박람회,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렸고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경복궁은 궁궐이 아니었다.
■ 잔재의 청산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경복궁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일제강점기 이후 70년 가까이 경복궁을 가리고 서 있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된 것이다. 1991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의 상징적 서막이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경복궁의 기본 틀을 바로잡는 1차 복원. 잔디밭만 펼쳐져 있던 경복궁에 하나둘 전각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2007년, 경복궁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태조 창건 당시 광화문 옛 터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 일제강점기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다가 1968년 콘크리트 부재로 중앙청 정문 자리에 재건되었던 광화문은 2010년,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제 모습으로 다시 섰다.
■ 경복궁, 오늘 그리고 내일
2018년, 경복궁 복원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할 놀라운 자료가 등장했다. 경복궁 중건 41개월 4일의 기록을 담은 <경복궁 영건일기>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간 색깔을 놓고 오랜 논란이 있었던 광화문 현판은 <경복궁 영건일기>에 기록된 대로 검정 바탕에 금빛 동판 글씨로 바뀌게 된다. 조각난 기록을 맞춰가며 철저한 고증 아래 계속되고 있는 경복궁 복원. 건물의 복원 과정 역시 전통을 고수한다. 정으로 쪼아 구멍을 내고 쐐기를 박아 큰 돌을 쪼개고 수십만 번 정질로 표면을 곱게 다듬어 나간다. 돌뿐만이 아니다. 목재도, 기와도 모두 옛 방식 그대로 전통 도구를 사용해 사람의 손으로 만든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며놓는 것이 아닌, 조선의 정신과 미학, 역사적 자긍심을 오늘에 전하는 것이 경복궁 복원의 진정한 의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원 30년을 맞은 경복궁은 이제 내일의 가치를 고민한다. 더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모두가 즐겨 찾고 그 가치를 함께 나누는 역사 문화 공간 경복궁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